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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신학자들의 맨 얼굴

복서겸파이터 2019. 8. 23. 22:49

 

1.     예수는 왜 죽음을 당했는가? 물론 널리 알려져 있듯이 교리적(dogmatic)으로 우리의 죄때문이다. 이는 교회에 의해 후향적(retrospective)으로 인정된 사실이지만, 단지 이렇게만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1세기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었던 나사렛 예수에 대한 과소평가이다.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당시 유대교 사회에서 신성모독이나 더 나아가 사형 언도를 받을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역사적 예수는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선포한 적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확실히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1세기에 예수라는 사람이 살았고, 로마에 대항하는 정치범들이 받을 수 있는 최악의 극형인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복음서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듯, 당시 로마가 그 통치방식에 있어 고대의 제국답게 잔인한 부분은 있었으나, 사법처리 방식은 그리 허술하지 않아 증거 없는 한 사람을 정치범으로 몰아 사형에 처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죽었는가?

2.     예수는 하느님의 왕국(kingdom of God)을 선포했다. 이 하느님의 왕국은 로마 황제의 제국과 같이 폭력, 결국 죽음의 공포를 그 통치기반으로 하는 로마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통치체계의 전복을 의미하였다. 더 과격(radical)하게는, 혈육에 의한 가족보다 사회에서 소외 받은 경계인과 죄인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고 서로 형제자매를 이루는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는 것까지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시대에까지 폭력이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옵션에서 이제는 민주화된 나라들이 그것을 독점하기까지 형태의 변화는 있으나 여전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의 통치체계의 근본에는 폭력(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화가 없다. 예수는 이 통치체계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였던 것이다. 이는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이든 간에 결국은 자신을 죽음으로 모는 행위가 되었고, 그것이 당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1948 1 30일에 죽지 않았다고 한들, 그가 온전히 자연사하였겠는가? 마틴 루터 킹이 1968 4 4일 한 인종차별주의자의 총을 피했다고 한들 그가 평안한 가운데 죽었겠는가? 예수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의 통치체계, 그리고 거기에 속한 엘리트들은 그러한 사람이 살아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3.     예수는 지배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요구한 적이 없다. ‘사두개인들보다 바리새인들이 그래도 더 깨끗하니 우선은 그들이 실권을 잡도록 도와라라고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였다. 그것이 예수가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식이었고, 그것은 죽음의 길이었다. 기독교역사에 예수 다음에 중요한 인물이라는 바울, 그 다음 중요한 인물 베드로, 또 그 다음 중요한 인물인 예수의 동생 야고보 모두 통치체계-지배체재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들이 잃은 것은 목숨이었고, 얻은 것은 영원한 생명이었다.

4.     이번 조국 게이트에 대한 소위 진보적 신학자들의 논평을 보았다. ‘집단적 히스테리의 광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이명박근혜의 죄에 비하면 조국의 흠결은 먼지와도 같다’, ‘똑같이 더럽더라도 그래도 진보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한다등등. 이번 게이트를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그들은 결국 이 지배체제에 속해있는 엘리트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국내 제도권 신학자들의 책은 결코 사지 않을 생각이다. 김규항 선생님의 글이 나에게는 훨씬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이다.

5.     이 시대에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세월호로 300명의 어린 목숨이 스러질 때 그때 같이 죽었다. 사발면을 가방에 넣고 다니던 비정규직 지하철 직원이 지하철에 치여 죽을 때 같이 죽었다. 탈북한 모자가 굶어 죽을 때 그 때 같이 죽었다. 예수는 사법개혁을 위해 작은 흠결을 덮고 민족과 정의를 위해 헌신할 후보자를 응원하는 자리에 결코 있지 않았다.

 

예레미야 23:21~32 (공동번역)

23:21 내가 보낸 적이 없는데 예언자라는 것이 튀어 나갔다. 내가 일러 적도 없는데 말이라 하면서 전하였다
23:22 나의 회의에 참석하였더라면 말을 백성에게 전할 있었으리라. 악한 길을 떠나게 있었으리라. 악한 소행을 고치게 있었으리라
23:23 말을 똑똑히 들어라. 내가 가까운 곳에만 있고 곳에는 없는 신인 아느냐
23:24 사람이 아무리 숨어도 눈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똑똑히 들어라. 하늘과 어디를 가나 내가 없는 곳은 없다. 똑똑히 들어라
23:25 예언자라는 것들이 이름을 팔아 예언하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 하면서 거짓말하는 것도 나는 들었다
23:26 망상을 말이라고 전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마음에 떠오른 생각을 말이라고 전할 것인가
23:27 예언자라는 것들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백성을 속여내 이름을 잊게 속셈이다. 조상들도 바알을 섬기다가 이름을 잊지 않았더냐
23:28 꿈이나 꾸는 예언자는 이야기나 하여라. 그러나 말을 받은 예언자는 말을 성실하게 전하여라. 내가 똑똑히 말한다. 검불과 밀알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23:29 말은 정녕 불같이 타오른다. 망치처럼 바위라도 부순다. 똑똑히 들어라
23:30 내가 똑똑히 일러 둔다. 이런 예언자들이 서로 말을 남의 입에서 훔쳐다가 떠벌이는데, 결코 그냥 두지 않으리라
23:31 내가 똑똑히 일러 둔다. 이런 예언자들이 말을 한답시고 혀를 놀리는데, 결코 그냥 두지 않으리라
23:32 내가 똑똑히 일러 둔다. 이런 예언자들이 개꿈을 꾸고 거짓말로 허풍을 떨어 가며 해몽을 하여 나의 백성을 속이는데, 결코 그냥 두지 않으리라. 나는 그런 말을 하라고 그것들을 보낸 적이 없다. 그것들은 백성에게 백해무익한 자들이다. 똑똑히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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