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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에 대한 잡설

복서겸파이터 2020. 5. 10. 07:58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는 것이 옳기도 하고, 신은커녕 존재라는 것의 말뜻도 정의하기가 쉽지 않은데, 신의 존재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는 하다. 하지만, 신학을 취미로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아무도 시키지 않았건만, 갑자기 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새벽에 글을 써본다.

사실 이 ‘존재’라는 것에 시간이라는 한 차원만 더하더라도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커진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던 데카르트도 이미 존재하지 않고, 우주의 역사가 138억년이라는데 100년도 못사는 인간이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다석 류영모는 우리는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는 존재’이고 신은 ‘없이 계신 이’라는 통찰을 남겼다고 한다. 이미 중세의 ‘부동의 동자’와 같은 우주론적 증명이나 자연신학적 증명은 파훼 된지가 오래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할지라도 신의 존재나 부재를 증명해줄 것 같지도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우선 현대 무신론의 원조인 루드비히 포이어바흐부터 이야기해야겠다. 포이어바흐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약하지만, 종으로서의 인간이 가진 거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투사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돌림으로써 신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은 니체와 프로이트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현대의 가장 뛰어난 포이어바흐의 후계자라면 유발 하라리라고 생각하는데, 유발 하라리는 현대인은 고대인이 보기에는 이미 거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있고, 앞으로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호모 데우스로 진화할 것이라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포이어바흐가 하나 간과한 것은 투사라는 것이 반드시 나쁜 영향만 있는 것이 아니라 투사를 통해 우리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해준다는 점은 투사의 좋은 점이라는 사실이다. 포이어바흐의 주장을 인정하면, 결국 인간의 마음속에는 무한하고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건데, 이것이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논리적인 결론인지 아니면 실제 인간의 마음속에 초월적인 무언가(하느님의 형상?)가 있어 이러한 사고를 이끌어내는 건지는 우선 차치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어느새 신에 대한 논의가 인간에 대한 논의로 넘어왔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과연 완전히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한데, 특히 유물론자들처럼 인간은 뇌라는 컴퓨터를 가진 기계라는 환원론적인 주장의 문제점을 생각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기계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은 생명체로서 진화하여 스스로에게 닥친 문제를 환경과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해결한다. 또한 기계는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작동을 하는 것이며, 인간은 실수를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예측불가능성이 존재한다. 인간을 한 개인(individual)으로 보지 않고 한 인격(person)으로 본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지는데, 인격은 분석하거나 분석 당하는 그 지점에서 환경이나 다른 인간과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내어 기존의 개념을 변화시킨다. 인간은 말 그대로 관계성내에서 존재하는데, 그 가장 근본적인 관계 맺음을 신이라고 설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간의 정신이 파악되기 힘들다는 것과 초월적인 능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불교도라면 더 쉽게 동의할 수 있을 텐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수행을 통한 해탈과 열반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독일의 현대 신학자 판넨베르크는 역사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는데, 유대인이라는 선택 받은 민족이 역사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고백하는 것은 늘 그들의 역사에 새로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며, 달이 차고 기우는 반복적이며 똑같은 자연현상과 달리 그들의 역사에는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일들이 창조되며, 자신들이 믿는 야훼라는 유일신에게 그 이유를 돌리고 있다. 물론, 고대 유대인들이 유일신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것과 같이 믿은 것은 아니며 신개념 역시 역사적 변천을 거쳤으나, 그것은 현재 논의에서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또한,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경험이라는 그야말로 ‘빅뱅’과 같은 사건에서 발생하게 되는데, 죽은 예수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그를 일으키셨다는 데로부터 신 존재의 역사적 근거를 찾고 있다. 부활이라는 것 자체가 역시 역사적 사실로 증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나, 제자들이 겪은 부활의 경험만은 –그게 무엇이던 간에-역사적 사실로 증명될 수 있다는 점이라고 판넨베르크는 주장한다.

결국 신 존재는 믿음이라는 요소를 포함할 수 밖에 없는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명이라는 폴 틸리히에 따르면 믿음이라는 것은 궁극적 관심을 갖는 것이며, 그야말로 궁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 믿음은 전인격적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며, 또 전인격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의식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인격구조의 참여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한다. 만일 의심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믿음에 방해가 되는 요소가 아니라 항상 믿음이라는 행위에 함께 존재해야 할 하나의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하지만 믿음의 대상은 궁극적인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는데, 궁극적이지 않은 것을 믿는 믿음은 결국 우상숭배적 믿음이 된다. 이 우상숭배적 믿음은 결국 인간을 실존적으로 무너뜨릴 수 밖에 없는데, 예를 들면 현대 자본주의의 성공신화(이명박?)나 맹목적으로 숭배되는 국가(2차대전의 독일국민?)의 경우를 들 수 있겠다. 그렇다면 만일 궁극적 관심이 실제 궁극적 실재를 믿게 되면서, 그의 실존적 위치가 오히려 더 공고해진다면, 즉 사랑이 더 충만해진다면, 신의 존재가 간접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틸리히는 존재의 바탕으로서의 신은 존재와 비존재 등의 분별을 넘어서기 때문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신의 존재 증명은 도덕경 1장을 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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