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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학회에서 발표를 할 때 발표하기에 앞서 이해의 상충(conflict of interest)을 반드시 선언하도록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신약의 효능을 발표하는데, 그 제약회사의 주식을 갖고 있다든지, 또는 그 회사의 요청으로 강의료를 받고 발표를 하는 건지에 대한 정보를 미리 청중들에게 주는 것이다. 여러 다른 이유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이 이해의 상충이 발표자가 발표할 내용과 얼마나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지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이라는 학문의 세계에서도 동일한 잣대를 들이민다면, 바트 어만 (Bart Ehrman)이야 말로 이해의 상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몇 안되는 신학자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은 더 이상 기독교에 믿음을 갖고 있지 않는 불가지론자라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 믿음을 유지하면서도 어느정도 객관적인 신학연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인간은 팔이 안으로 굽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편견 또는 선입견은 가지게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바트 어만은 인간의 기억에 대한 다양한 현대의 사회과학적, 심리학적 연구결과를 제시해준다. 인간의 기억은 그 당시 사건을 사진 찍듯이, 또는 동영상을 촬영하듯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조각들을 뇌의 여러 부분에 나누어 저장했다가 회상 때에는 그것을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기억해내는데, 잃어버린 조각들을 무의식적으로 '만들어’ 채워 넣는 방식으로 회상한다고 한다. 그렇게 재조합 된 기억은 그 기억이 가리키는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으며, 드물게는 기억의 핵심적인 부분 마저도 바뀌며, 당사자는 그것을 인지할 수조차 없다는 연구결과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바트 어만이 어렸을 적에는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위인으로 칭송되었으나, 현대에 이르러 잔인한 범죄자라는 평가가 더 압도적이다. 또한 그 유명한 마사다 요새 사건(1세기 유대-로마전쟁의 마지막 요새로 함락되기 직전 대부분의 사람이 자결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군인들은 그곳에서 다시는 치욕스러운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다짐한다고 알고 있다)도 사실 알고 보면, 1920년대 이후 생겨난 현대의 신화로서, 시오니즘과 이스라엘 건국 이후에 강조된 국가 이데올로기 강화의 한 방편이라는 사실은 꽤나 흥미로웠다.
즉, 과거의 모든 기억은 현재의 관심사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며, 독립적이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기억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다.
문자로 기억되기 전의 구전 문학 등에서 나타나는 흥미로운 사실은 같은 주제의 구전문학작품도 스승과 제자가 다르고, 심지어는 같은 사람도 어제와 오늘 공연에서 관객과 호흡하면서, 큰 줄거리를 빼고는 다르게 공연한다고 한다(우리나라의 판소리를 생각하면 이해가 편할 듯싶다). 그러나 이 구전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은 엄밀한 언어의 동일성에 구애 받지 않으며, 다소간 내용이 달라지더라도 ‘똑같은 작품’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전문학은 기록이 되기 시작한 이후에야, 그 원전의 내용이 달라지지 않기 위한 노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전제조건을 가지고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을 관찰할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이 AD 30년경이라고 본다면 가장 먼저 쓰여졌다는 마가복음서가 약 AD70년 그리고 가장 늦게 쓰여진 요한복음서는 AD95년 경인데, 이는 예수 사후 40~65년이라는 긴 세월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에는 결국 구전에 의해 예수의 언행이 전해졌을 텐데,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억의 왜곡과 변형, 심지어는 핵심적인 부분까지도 변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마가복음의 예수와 요한복음의 예수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데, 마가복음의 예수는 스스로의 정체를 결코 드러내지 않으며, 부활한 이후까지도 예수의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오직 예수의 처형을 지켜보았던 로마의 백부장만이 그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식한다는 점이 매우 시니컬하다.
반면, 요한복음의 예수는 프롤로그에서부터 천지창조 이전부터 있었던 말씀이자, 하느님과 동일하신 분으로 선언하고 시작하며, 뒤에서는 예수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에 거리낌이 없다 (나는 길이요 생명이다, 아브라함 이전부터 나는 있다 등등).
이렇게 복음서마다 다른 예수에 대한 해석과 언행을 기록하는 것은 마가의 공동체와 요한의 공동체가 복음서를 기록했을 당시의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마가에게는 십자가에서 처형된 범죄자가 왜 메시아인가를 변증하는 것이 중요했고, 요한의 공동체는 유대교 공회로부터 축출당한 뒤에 본인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해야 했는데, 자신들만이 ‘빛’을 알아보았고, 유대인들은 예수 생전부터 그를 적대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내가 느낀 결론은 원본이라는 것은 없다는 점이다. 역사적 사실은 있다. 그러나 그것을 온전히 (‘온전히’라는 말 자체에 편견 또는 모순이 담겨있다)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중요하지도 않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실만이 있고 그것만이 우리의 세상이 된다. 살아있는 말씀은 문자에 의해 박제가 된다. 이 박제된 문자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맞는 변형된 기억을 통해 이루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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